천국과 지옥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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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

존 번연이 본 천국과 지옥

 

존 번연(John Bunyan)은 1628년 영국 엘리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가난했지만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영계를 직접 체험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책 내용이 모두 성경적이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수준 높은 글들이 많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나온 계시적인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책의 주인공(에페네투스)은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무신론자 친구로부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은 저절로 존재하며, 인간은 마음껏 즐기다가 흙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신앙에 의심이 생겼고, 오히려 마음에 갈등과 괴로움이 늘었으며, 절망한 나머지 자살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시행하려는 찰나에 하나님의 형상을 멸하면 자비를 얻을 수 없고, 멸망에 이르게 되며, 불구대천의 원수만 기쁘게 한다는 나직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음성을 듣고 놀라 자살하려고 붙잡고 있던 도구를 내 던졌고, 두려운 마음이 엄습하였으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고,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인간의 양심과 수 많은 증인들이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둑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홀연히 영광스러운 광채가 나타났고, 영광의 광채가 주위를 두르고 있는 사람의 형상(천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모는 경외감을 주고, 즐거운 분위기가 섞여 있어서 나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으나 발산되는 광채는 몹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에페네투스는 발에 힘이 빠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게 되었고, 천사가 팔을 붙잡아 일으켜 준 덕분에 두 발을 버티고 섰더니 새 힘이 생겼습니다.
에페네투스가 힘을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자 천사는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에페네투스가 영원한 멸망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서 왔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에페네투스에게 악한 생각을 집어 넣어 멸망시키려는 순간 하나님이 한량 없는 은총으로 에페네투스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사망과 지옥에서 건짐 받은 에페네투스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천사는 자신이 온 목적은 에페네투스에게 영원한 세계를 직접 보여줘 다시는 의심하지 않고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사를 따라 들림 받아 천상으로 향하던 에페네투스는 아래 작게 보이는 검은 지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천사는 어둡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지점이 인간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며 사는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래 세상은 작고 시시하게 보이지만, 위에 것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어두운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빛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아래 세상에 오셔서 '생명의 빛'(요 8/12)을 비추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요 3/19)

에페네투스와 천사가 천국을 향해 올라갈 때 천사의 광채를 보고 도망치며, 세상 위에서 배회하는 검고 역겨운 무리들은 반역죄로 하늘에서 쫓겨난 변절한 천사(마귀)입니다.
이들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세상에서 사람들을 시험하고, 악인들에게 멸망의 인(印)을 칩니다.
마귀들은 죄로 인해 빛의 옷을 상실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뭉쳐 있습니다.

마귀들에게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예정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천국의 후사가 되는 것에 대해 몹시 배 아파하며, 증오하고 대적합니다.

 

* 목차

1부 천국과 그 영광을 보다

a) 천국에서 엘리야를 만나다

b) 천국에서 옛 친구를 만나다

 

2부 지옥과 멸망당한 자들의 고통을 목격하다

a) 지옥의 비참한 상태

 

 

1부 천국과 그 영광을 보다 

 

에페네투스는 천국에서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과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과 형언할 수 없는 소리에 대해 천국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고전 2/9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느니라.” 한 것이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끌려 올라가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로다.

천국에 이르자 많은 무리가 빛을 발하며 에페네투스를 맞이했는데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온전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태양이나 조명이 필요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발산되는 빛만이 천상의 거처를 두로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비하면 태양빛은 어두움 같고, 찬란한 다이아몬드와 루비의 반짝거림과 진주의 광채도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타다 남은 석탄과 같았습니다.

천국의 높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수 많은 천사들과 성도들의 '할렐루야' 찬미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뵙기에는 너무나 찬란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영광을 천국에 충만하게 채우고 계시기 때문에 '영광의 하나님'이라 부르기에 합당하십니다.

복락과 차분한 기쁨, 환희의 강물이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와 그분의 행복한 처소요 영원한 왕국이 자리 잡고 있는 천국의 모든 복된 거민들에게 흘러갔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에페네투스의 시력으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 한 줄기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영광스러운 광경이지만 너무나 신선하고 즐거워서 보다가 죽을지언정 원 없이 보고 싶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천사는 천국에 죽음이나 슬픔이나 죄는 발을 붙힐 수 없고, 생명과 불멸이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 오려면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a) 천국에서 엘리야를 만나다

에페네투스는 천국에서 엘리야에게 인도되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선지자였고, 하늘로 들림 받았던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육체는 영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상태로 변했으며, 보좌를 옹위하는 천사와 같이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천국의 완전한 행복 속에서 누리는 기쁨은 다 표현할 수 없고, 항상 새로운 행복을 맛 보기 때문에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의 끝이 어딘지도 알지 못한다.

에페네투스가 어떻게 행복이 절대 완전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울 수 있는지 묻자 엘리야는 답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영혼과 육체가 모두 행복한데, 이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의 상태이다.
행복이란 영원 무궁히 영광스러우시고 복되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 그 핵심인데, 이는 하나님이 언제나 새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것들은 무한하다.

그 영원하고도 완전한 것들이 우리의 행복에 영원히 새로운 내용을 덧 붙힌다.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과 보석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들을 위해여 예비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 천국에서 복을 누리는 영혼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첫째로 죄야말로 피조물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뜨리는 장본인이다.
배교한 천사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망쳐 놓은 것이 죄이다.
인간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만물의 영장을 정욕의 노예로 만든 것도 죄이다.
죄 때문에 인간은 헤어나올 길 없는 영원한 비참의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행복한 천국에서는 모든 거민이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에서 영원히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비인가!
아래 세상에서는 아무리 덕망이 높고 거룩한 사람도 부패의 짐에 짓눌려 신음한다.
사사건건 죄가 달라 붙어 원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 탄식하기 일수였다.
이른 바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부패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죄가 여간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국에서 이제 그들의 영혼은 육신을 벗을 때 마치 새장에 갇혔다가 풀려난 새와 같았다.
아래 세상에서 평생 싸워 온 죄를 마침내 이기고, 천상의 활력을 입어 이 복된 지대로 가볍게 날아 올랐다.
이 곳에서 그들의 싸움은 끝났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었다.
죄로 인해 더럽혀졌던 영혼이 이제 복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아버지 앞에 티나 주름잡힌 것 없이 찬란이 빛난다.

 

둘째로 이 곳의 복된 영혼들은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만한 조건에서도 완전히 해방되었다.
아담은 자신이 흠이 없고 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탄의 시험에 철저히 넘어져 버렸다.
천국에서는 사탄이 누구도 시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부패와 오염도 침입할 수 없다.
오직 순결하고 거룩한 것만 용납된다.

타락한 매력과 유혹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던 세상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이 곳에 당도한 복된 영혼들을 더 이상 시험하지 못한다.
아래 세상에서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유혹이 대단히 강렬하지만 이 곳에 안전히 당도한 복된 영혼들에게는 지상의 모든 낙이 시시하고 누추해 보인다.

이 곳의 우리는 세상과 그 유혹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힘 입어 극복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곳에는 우리의 평화를 깨뜨릴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영원한 평강이 우리의 행복 위에 얹혀져 있다.
우리가 죄와 그에 따른 모든 유혹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곳에서 우리는 죄의 결과들에서 해방되었다.
아래 세상에서 죽음이 들어 오게 한 장본인이 바로 죄이다.
모든 사멸자들이 발견하듯이 죽음은 하늘의 숭고한 법령이 죄에 대해 매긴 공의로운 대가이다.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부활하셔서 마귀에게 승리를 거두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셨으니 그 거룩하신 이름에 영원히 찬미와 개가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

 

* 천국에 사는 자들의 특권

이 곳에서 우리는 모든 행복이 흘러 나오는 복된 샘이자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을 뵙는 특권을 맛보며 산다.
하나님을 뵙는 것은 끊임 없이 우리의 깨달음을 밝히고, 우리 영혼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벧전 1/8)으로 차고 넘치게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살며 사랑하며 노래하고 한 없이 찬송하게 한다.
이 사랑이 우리 영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영원한 행복의 처소에 안착한 우리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렀다.'
(고후 3/18)

하나님의 웃는 낯이 우리 영을 한 없이 기쁘게 하는 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직접 뵘으로써 우리 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받아 환해지기 때문에 아래 세상에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된다.

하나님을 즐거워 함으로써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도 우리 안에서 거하신다.(요일 4/13)
우리는 '신의 품성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어 그 성품이 우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아래 세상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지만 이곳의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그분을 뵙는다.
아래 세상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즐기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한량 없이 즐긴다.

아래 세상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자주 단절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중단 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아래 세상 성도들은 부분적으로 보고 알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한 것을 누리며 불완전한 것은 이미 사라졌다.
아래 세상에서는 사랑에 두러움과 고통이 섞여 있지만 이곳에서는 온전한 사랑이기에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이곳에서 우리는 복되신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며,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한다.
아래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경로로 나뉘지만 이곳에서는 사랑이 하나의 물줄기로 흐르며, 그 근원은 우리 행복의 샘이신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다.

아래 세상에서는 지식도 불완전하여 깨진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보며,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전 13/12)

이곳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온전하다.
아래 세상에서는 기쁨의 한쪽 구석에 슬픔과 탄식이 스며 있게 마련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슬픔도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슬픔의 원인인 모든 죄가 추방되었고, 죄의 결과인 모든 슬픔도 그쳤다.
사실상 우리의 복되신 구주 덕분에 땅에서 죄로 인해 슬퍼했던 경험 자체가 이곳에서는 오히려 기쁨을 배가시킨다.

 

* 천국에 사는 자들의 능력

이곳에서 우리의 능력은 수행해야 할 과업의 성격에 따라 무한하게 발휘된다.
아래 세상에서는 오감(五感)의 창을 통해서만 우리 정신에 빛이 비취었다.
그러므로 복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을 감안하시어 스스로 낮추사 좁디좁은 우리 생각에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훨씬 더 영광스럽게 나타나며, 실수와 오류가 있는 감각들을 통해서 흐르던 지상적 이미지들이 우리의 정신에서 깨끗이 벗겨졌다.

아래 세상에서는 영광의 객체들이 감각의 인식에 맞춰졌으나, 이곳에서는 감각의 기능이 향상되고 정교해지고 영광의 주체들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적인 빛이 직사광선으로 비취고, 육체의 두터운 커튼도 영화(靈化)하여 투명해져서 영혼이 하나님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아래 세상에서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본성에 관해서 믿음으로 알던 것(하나님의 작정과 뜻, 섭리와 경륜)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본다.
하 나님이 영원히 유일하게 존재하시되 외톨이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 신격(神格)이 온전히 통일되어 있고 수적으로 나뉘지도 않는다는 것, 불가해한 성삼위(聖三位)의 거룩한 위격(位格)들이 질서는 있되 우월하고 열등한 서열은 없다는 것, 오히려 위격들이 동일한 신적 속성들과 동일한 신적 권세를 지니시며, 동일한 경배의 대상이란 것을 분명히 안다.

 

* 영적인 몸의 특성들

이 모든 것은 영혼들에게 관계된 것이고, 천국에 거하는 자들의 진정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할 때 비로서 온전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에녹과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옮겨 왔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분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부활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표상이다.
아직 위대한 메시아를 제외하고 부활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부활의 첫 열매시다.(고전 15/23)
부활에 관해서는 부활하신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몸을 봐야 온전히 알 수 있다.

부활 때 천국의 사람들의 육체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영적인) 몸이 될 것이다.
네가 나를 볼 뿐 아니라 만져보면 내가 말하는 영적 몸이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적 몸은 모든 부패의 요소가 깨끗이 씻겨나간 정결한 몸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몸이 영적인 이유가 모든 부패의 요소를 씻어냈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잠과 의복 등 아래 세상에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들 없이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부활 시에 입을 몸은 죽음을 모르는 불멸의 몸이다.
아래 세상의 몸은 죽어 소멸되고 흙으로 해체되지만 영적인 몸은 영원히 썩지 않고 죽음에서 벗어나 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게 될 것이다.

고후 5/4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 지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죽음을 맛 보셨듯이 그 자격으로 다시 살아 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고전 15/20~23)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에(엡 1/22) 예수님의 지체된 성도도 예수님처럼 부활해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부활시에는 육체도 잠에서 깨어나 영광스러운 불멸의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다.
영혼 뿐 아니라 육체도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아래 세상에서 선행은 영혼의 구상과 결단으로 계획되지만 실행은 육체가 한다.
영혼이 천국에서 영화롭게 되는데 하나님이 육체를 차별해 영원히 흙 속에 남게 하겠느냐?

아래 세상에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영혼과 육체가 경주를 함께 했으므로 장차 상도 함께 받을 것이다.
큰 심판 날에 복된 자들이 의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때(딤후 4/8) 영혼과 육체가 함께 존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천국의 복된 영혼들의 육체가 누리게 될 또 다른 행복은 강건하여서 고통을 겪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래 세상에서 성도들이 입고 있는 몸은 약해지기도 하고 병에 걸리기도 하여 죽음을 자주 예감하는 취약한 몸이다.
때로는 육체의 고통과 불구가 극심하여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을 지라도 다른 고통이 찾아 오는데,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리어 삶이 몹시 궁색하고 불편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감안할 때 아래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육체가 비참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러한 악과 저주가 침범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은 죄의 결과들이다.
지금 내 육체는 죄로 인해서든 슬픔으로 인해서든 어떠한 고통도 느끼는 일이 없다.

정반대로 복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는 빛과 영광을 동시에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장차 부활의 날에는 모든 성도들이 나와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 육체가 복된 부활의 상태에서 누리게 될 또 다른 행복은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아래 세상에서 육체는 죄와 부패를 지향하는 타락한 몸일 뿐이다.
육체가 무덤에 들어가면 구더기가 파 먹으며, 악취가 진동한다.

세상에서는 육체가 끊임 없이 먹고 마심으로써 활력을 유지했으나 이 복된 상태에서는 육체가 영적 특성들을 지니며, 외부의 영양공급이 없어도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생명이 유지된다.
부활의 날에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패한 육체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몸에 입혀주실 이 초월적 아름다움은 그 분이 손으로 빚어내실 작품일 것이며, 전능자가 개입하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죽음에서 일어난 몸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것에 불멸의 영광을 입히는 일이 전능자에게는 쉬운 일이다.

우리 행복의 또 다른 부분은 우리 육체가 민첩하여져서 형언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 세상에 살 때 우리 육체는 거북하고 불편하여 영혼에 큰 부담을 주었다.
영적인 몸은 새가 공중을 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복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는 부활의 날에 영적인 몸이 순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늘에 죄가 들어 온다면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마저 망쳐 놓을 것이다.
우리의 영광은 이곳에서 우리 육체가 순결하게 되어 죄가 하나도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부활의 날에 성도들의 몸은 복되신 우리 구주의 영광스러운 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권능을 힘 입어 성도들의 몸이 썩을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고전 15/42~43)
그 복된 부활의 상태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승리의 나라에서 해보다 밝게 빛날 것이다.

 

b) 천국에서 옛 친구를 만나다

에페네투스는 얼마 전에 사별한 친구 주니우스(Junius)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니우스는 엘리야와는 달리 영적인 몸을 입지 않았고, 자기 육체를 아래 세상에 벗어 놓고 부활 때까지 안식하도록 놔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니우스는 에페네투스에게 다음과 같이 천국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 곳에서 우리의 큰 행복일세.
보좌 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크고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송을 부르는데, 그 내용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계시록 5/12)라는 것이지.

이 곳에서는 지극히 찬란한 면류관을 쓴 이들도 자기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놓으면서 “오 주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으며, 또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말한다네.

하나님을 직접 뵈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데, 그것은 직접 맛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이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도 하나님 앞에서면 너무나 찬란하고 압도적인 영광의 광채를 견디기 힘들다네.

천국에서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합하여 거대한 성가대를 이루고 있지.
이곳에 사는 복된 성도들과 천사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묵상하는 것 뿐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품는 사랑의 토대가 되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누린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네.
하나님의 사랑의 복의 근원으로 모든 복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할 때 쓰시는 통로와 같다네.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앞 못 보는 소경과 같은 사람이야.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은 워낙 큰 영적 선물과 그로 말미암는 기쁨을 약속하신 까닭에 그 약속만 가지고도 큰 위로를 받고 남음이 있었지.
과연 그 약속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신분에 합당하게 버릴 것을 요구한 일시적인 세상 낙들을 훨씬 능가하는 귀한 것이었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두운 눈이 감길 때 오히려 가장 밝게 나타나게 돼.
영이 육신을 떠날 때 하나님은 곁에 가장 가까이 있어 줌으로써, 이 복된 곳에 도착하는 영혼마다 옛적에 나오미가 보아스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서 우러 나오게 만들지.

룻기 2/20 나 오미가 그녀의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산 자와 죽은 자에게서 그의 친절을 거두지 아니한 그 사람이 주로부터 복받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나오미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우리에게 가까운 친족이며 우리의 다음 친척 중 하나니라.” 하더라. 

우리가 이렇게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 덕분이야.
천국은 어디를 가나 행복이 넘치는 곳이지.
세상의 여러 가지 낙에는 공허도 많이 따르지만, 천국의 복락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지.
일찍이 사도가 말한 그대로일세.

고전 2/9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느니라.” 한 것이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천국의 복락

우리가 누리는 정결한 기쁨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설 뿐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만큼 지고(至高)하지.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완전한 행복인 줄 알고 살았든 간에 이곳에서 누리는 경험은 우리의 기대를 크게 넘어선다네.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살 때 품었던 생각들이 씻겨질 뿐 아니라 그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차원에 올려지지.
이곳에서 우리 기능들이 적절하고 좋은 대상들을 맞이할 뿐 아니라, 우리 기능 자체가 높아지고 확대되기 때문이지.

복을 받아 이 거룩한 장소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베풀어진다네.
첫 째는 복된 영혼이 이 곳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롭고 독특한 환경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여러 역량이 확대되어 전에 알지 못하던 대상들도 알아보고 거기서 새롭고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지.

이곳의 행복은 아무리 큰 과정법을 사용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되다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쁨을 일일이 열거하고 평가하는 법을 배우는데, 그것이 다 합쳐져서 완전하고 영원히 참된 복락을 누리는 것일세.

이곳에서 우리가 품는 소원은 잘못된 대상을 선택하는 일도 없고, 성취되지 않는 일도 없다네.
소원이 어김 없이 올바른 데다 틀림 없이 성취되거든.

이곳에서 우리는 아래 세상에서 그토록 흠모하던 복된 성도들을 만날 뿐 아니라 그들처럼 되기까지 한다네.
성경에서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이 바로 그들이지.
아래 세상에서 온갖 고초와 몰이해를 당했을지라도 이곳에서는 실은 인품이 너무 훌륭하여 존경의 심정을 금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들도 만난다네.

 

*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광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곳에서 한 번 뵈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예수님)을 보고 살지.
그분은 무한히 완전하신 점과 측량할 수 없이 크고 많은 유익을 끼쳤다는 점에서 우리의 진실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지.

복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빌 2/7)를 가지신 목적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아래 세상에서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시기 위함이었지.
그분은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딤전 6/15)로서 왕의 직분에 따른 왕의 지위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부여되었지.(마 28/18)

그분은 찬란한 엄위와 광채에 둘러싸여 계셔서 과연 우리가 가장 흠모할 분임을 금방 알 수 있다네.
그분의 눈은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숭고한 영광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빛난다네.
그러나 복되신 우리 구주께서는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울지라도 두려워 범접하기 어렵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인자하시고 친절하시다네.

우리 구주께서 누리고 계신 형언할 수 없이 큰 행복이 그분에 대한 우리 사랑의 열기에 따라 우리에게도 행복을 가중시킨다네.
이곳에서 우리가 맛보는 기쁨은 참으로 크지만 기쁨에 무슨 조건이나 상황이 굳이 필요 없어.
우리 구주께서 행복해 하시는 사실 그 자체가 그분이 내리시는 후한 선물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뚜렷한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 행복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지.

주님은 충성된 종들을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시지.(마 25/21)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역량과 조건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위해 풍부한 행복의 근원을 마련해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시거나 그분의 기쁨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것이 그분이 항상 해 오신 자비의 일이라네.
몸소 고난을 당하시어 우리의 비참함을 덜어주시거나 몸소 기쁨을 나눠주시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시는 것일세.

 

* 완전한 사랑

이곳에서는 복된 자들이 하나님과 서로 간에 완전한 연합과 사귐 안에서 살고 있지.
이곳에서는 '장자들의 총회'(히 12/23)가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직접 뵙고 복을 누리는 까닭에 서로에 대해서도 그 순결한 사회를 하나로 연합시키는 지극히 순수한 기쁨과 거짓 없는 뜨거운 사랑을 주고 받는다네.

천국에서는 사랑의 동기도 훨씬 숭고하고 사랑의 정도도 땅에서와 비교할 수 없이 뜨겁다네.
우리의 영적인 관계는 아무리 강한 혈연적 유대보다 더 가깝고 항구적이지.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네.

사랑이라는 중요한 동기는 아래 세상에서조차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지.
아래 세상에서도 지혜와 거룩과 선과 정절이 서로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며, 혈육의 관계나 그 밖의 육체적 관계보다 더욱 친밀하게 영혼들을 결합시킨다네.

주름이 있고 건장한 모습이 사라진 노인이라도 덕이 있으면 존경을 받고, 아름답고 젊을지라도 약하면 혐오의 대상이 되지.
에페네투스, 자네는 천국에서 육체의 눈보다 더 총명한 눈을 보았고, 감지할 수 있는 빛보다 더 순결한 빛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신적인 아름다움, 감각적 사랑보다 더 고상한 사랑을 본 것일세.
왕이면서 선지자였던 다윗이 '나의 모든 즐거움은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라고 예찬한 것이 바로 그것이지.

아래 세상에서는 아무리 영적인 사랑일지라도 불순한 요소들이 끼어 있다네.
훌륭한 위인들에게도 취약한 점과 흠이 있어서 그들에 대한 존경을 깍아 내리게 되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영광스러운 덕성들이 다 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네.

복된 영혼 하나하나가 최초로 덕의 온전한 본을 보이신 구주와 정확히 일치한다네.
신적인 아름다움이 그들 안에서 영원히 빛난다네.
그것은 오염된 열기를 조금도 내뿜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범접과 상해를 당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안에 비치는데, 거룩한 눈에 하나님을 닮은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해 보이겠는가!
나는 동료 성도들이 불멸의 사랑으로 빛나는 모습에 항상 매료된다네.
이곳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온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네.
이러한 사랑을 품고 연합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완전한 행복

이 복된 곳에 사는 사람은 소원을 품을 필요 외에는 다른 아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네.
무엇을 소원하면 즉시 풍성하게 얻게 되지.

항상 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새롭다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특징이라네.
권태는 대상이든 욕구든 어느 한 쪽이 불완전할 때 생기는 법이지.

이곳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은 워낙 크기 때문에 복의 내용이 다채로울 필요는 굳이 없다네.
다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끊임 없이 배워가는 지식 뿐이야.
땅에서 굳이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다이아몬드가 다양한 각도에서 발산하는 광채일 것일세.

하나님 안에도 이와 같이 동질의 다양함이 있으며, 이 다양함은 영원히 배워도 다 깨달을 수 없으면서도 인간에게 피곤함과 번민을 주지 않는다네.
이곳에서 복 받은 영혼들도 항상 처음인 것처럼 매 순간 설렘으로 기쁨을 맛본다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은 다함이 없고 광활하여서 그것을 온전히 맛보려면 영원의 세월이 필요한데, 바로 우리가 그 세월 안에 놓여 있지.

천국에 대해 말해 주었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의 천분의 일도 하지 못했고, 이곳에 와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없지.
이제 자네가 할 일은 사멸적 육신을 내려 놓는 날까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히 6/12) 기다리는 일일세.

히브리서 6/12 이는 너희가 게으른 자가 되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하여 그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

 

 

2부 지옥과 멸망당한 자들의 고통을 목격하다

 

a) 지옥의 비참한 상태

에페네투스는 천사를 따라 천국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짙은 어두움에 둘러싸인 지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불 붙은 유황보다 더 독한 매연이 코를 찔렀고, 귀도 저주 받은 영혼들이 내지르는 참혹한 고함 소리에 멍멍했습니다.
지상의 아무리 심한 아비규환일지라도 이 상황과 비교하면 차라리 듣기 좋은 음악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지옥의 변경에 와 있다.

멸망자 마귀의 힘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미 내가 하나님의 권좌로부터 받은 위임장이 너를 모든 위험에서 건져줄 것이다.

이곳에서는 악귀들과 저주 받은 영혼들한테서 이런 영원한 멸망을 당한 까닭을 들을 수 있다.

들에게 묻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들이 네게 대답해 줄 것이다.

악귀들이 너를 해치고 싶어도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이 그들을 단단히 결박해놓았으므로 해치지 한다.

그들은 감각을 느끼기 때문에 분노에 떨고 안달하고 고함 지르고 혐오스러운 사슬을 물어뜯으나 모두 허사이다."

에페네투스가 말하기를 "지옥의 연기 자욱한 용암 못에는 루시퍼가 하늘의 확정된 명령의 사슬로 단단히 결박당한 채 화염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사나운 눈에는 지독한 고통과 사무치는 원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옥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지옥 전체가 괴성으로 진동했는데 이는 루시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악을 쓰며 토해내는 참람한 말 때문이었다.
그의 말투에 교만과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분노도 악의도 아닌 권력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루시퍼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하늘을 차지하고 내가 쥐고 있어야 할 찬란한 홀을 쥐고 있다.

그가 나를 죽음과 슬픔과 저주로 가득 찬 이 흑암의 집, 내가 당연히 상속 받아야 할 빛이 사라지는 법이 없는 들판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가둬놓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지옥마저 내게서 빼앗아 이곳에서 나를 모욕하겠다는건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늘을 뒤엎고 그의 찬란한 권좌를 산산조각 내고 말 것이다.

그 때는 내가 패했으나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하늘의 아치 지붕 밑에 거하는 날개 달리 영들 가운데 나만큼 공정하게 승리를 추구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패하여 영원한 멸망의 선고를 받고는 이 캄캄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하지만 인류가 나의 저주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을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된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내 분노를 퍼부울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배나 쏟아 부을 것이다."

천사는 루시퍼가 참람한 말을 쏟아낼수록 지옥의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형벌을 가중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에페네투스는 그 자리를 떠나 가다가 처참한 슬픔이 내리 누르는 곳에서 마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가련한 두 영혼을 만났습니다.
마귀는 두 영혼이 펄펄 끓는 불못에서 기어 나오면 즉시 그들을 다시 불못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두 영혼은 서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한 영혼이 고통 당하는 동료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너 같은 저주 받은 얼굴을 날마다 쳐다 봐야 하다니!

가뜩이나 고통스러운데 너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너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너는 무척 고소하겠지.

네가 나를 유혹하고 올무를 놓았다.
네 탐욕과 질투와 속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한 일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네가 나를 위해 선한 본을 보여 주었다면 틀림 없이 천국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텐데.

아 내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인가!
너를 따라 가다가 그만 이 혐오스러운 곳에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었구나!

아예 네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니 네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영혼이 이런 가련한 운명에 떨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을 듣고 있던 동료는 이렇게 맞받아쳤습니다.

"나라고 너를 저주하지 못하겠는가!

그때 그 장소에서 네가 나를 유혹하여 끌어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합법적인 일을 하고 있던 나를 꾀어낸 것은 바로 너이다.

나는 탐욕이 있었고 너는 나로부터 탐욕을 배웠지.

하지만 나는 너로부터 음란과 거짓말과 선을 비웃는 태도를 배웠다.

너도 나를 넘어지게 했으므로 나도 너를 비난할 수 있다.

네 몰골만 봐도 세상에서 짓던 죄가 새록새록 생각나서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생긴다.

그곳에서 너와 사귀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너와 함께 지내는 불행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들간의 대화를 들으면서 에페네투스는 세상에서 함께 죄를 짓는 자들은 지옥에서도 함께 형벌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서로 사랑할지라도, 지옥에서는 서로를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 공의로운 형벌

에페네투스는 두 비참한 영혼이 있는 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한 여자 영혼이 마귀의 강압으로 활활 타는 유황을 입으로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페네투스는 마귀에게 왜 비참한 영혼에게 지옥의 용액을 마시게 하면서 기뻐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마귀가 말하기를 "이 여자는 많은 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한 구두쇠로 공의에 대한 응징일 뿐이다.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으면서도 쓰는 것이 아까워 겨우 끼니만 잇고 살았다.

불룩한 돈가방을 곁에 두고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내거나 다른 사람이 내는 돈으로 허기를 면한 때가 많았다.

이 여자는 세금이 무서워 집도 없이 살았다.
자신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남을 속여서 재산을 불리면서도 사기를 당할까봐 남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지도 못했다.
돈 때문에 제 몸에서 음식을 빼앗고 제 영혼에서 자비를 강탈했으니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가!

이렇게 땅에서 금을 신으로 모셨으니 지옥에서도 그것을 먹여주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마귀가 말을 마치자 여자는 사실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귀가 내 입에 쏟아 붓는 것이 금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금이라면 불평하지 않을 거에요.

그가 내게 먹이는 것은 금이 아니라 악취가 진동하는 유황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금을 이곳에도 가지고 왔다면 행복할텐데.

나는 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잘 압니다.

만약 내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금이 지금 내 손에 있다면 천국에 뇌물을 바쳐 당장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에페네투스는 여자가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재물을 그토록 우상시 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돈을 사랑하면 영혼은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돈를 사랑하도록 버림 받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 끊임 없이 죽음의 고통을 당함

에페네투스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뜨겁게 달군 철침대에 눕혀져 유황에 거의 질식된 비참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니, 무섭도록 비참하다!

이 고통을 잠시라도 면할 수만 있다면 백만번의 세상과 기꺼이 바꿀 마음도 있는데!

백만년이 지나도 이 고통은 끊이지 않을 것이니 이 얼마나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인가?

이 영원히 저주 받은 고통이여!

내가 얼마나 고의적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던가!

죄의 짧고 찰나적인 쾌락을 택하고서 영원한 고통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얼마나 숱하게 받았던가!

죄의 길은 영원한 죽음의 방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 길을 버려야 한다고 얼마나 자주 경책을 당했던가!

그러나 귀먹은 독사가 자기를 부르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듯이 나도 그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 버렸다.

쾌락은 잠시요 그 후에는 곧 영원한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그들이 내게 얼마나 자주 타일렀던가!

이젠 이 모진 고생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뼛 속 깊이 절감한다.

이전 확실히 알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을까?

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태만과 무관심이 나를 찔러 죽였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우습게 여겼다.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는 게 바로 이것이구나.

행복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구원의 기회가 여러 번 내 앞에 주어졌는데 그것을 차버리고 말았다.

쾌락은 인류를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구나!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는데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숱하게 무시했으며, 하나님의 책망을 그동안 숱하게 뿌리쳤다.

하지만 이제 무대가 바뀌었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젠 전능자께서 내 재앙을 보고 웃으시며, 내게 닥친 파멸을 보고 조소하신다.

그때는 내가 마음을 닫아 걸었다.

그러므로 내가 선고 받은 이 영원한 고통은 내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다.

내겐 지푸라기만한 희망도 없으며, 영원히 멸망당했다."

 

* 멸망당한 자들이 상실한 것

지옥에서 탄식하던 영혼은 지옥에서 상실한 것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복되신 하나님을 뵐 기회를 상실했소.

이 사실이 이 지하 감옥을 지옥으로 만드는 거요.

하나님의 은총이 아주 희미하게라도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다면 뛸 듯이 행복하겠소만, 우리는 그런 기회를 다 잃어 버리고 영원한 슬픔에 떨어진 것이오.

이곳에서 우리는 성도들과 천사들도 상실했고, 우리 곁에는 고문을 가하는 마귀들만 있을 뿐이오.
이곳에서 우리는 복락의 장소인 천국도 상실했오.

복된 자들이 행복으로 맞아 들이는 영원한 문들이 우리에게는 닫혀 있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동정을 상실했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토록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는데.

이제는 긍휼을 거두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기쁘게 여기시되 영원히 그리할 것으로 생각되니 더욱 절망스러운 것이오.

하나님을 잃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고통을 배나 더 크게 합니다.

구주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에게는 긍휼히 여기시기를 거부하신다는 것만큼 더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

성도들과 천사들도 우리를 동정하지 않는다오.

오히려 우리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울부짖고 있는 동안 성도들도 우리가 멸망당한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고 계신다오.

우리 죄의 참담한 결과가 이런 것임을 잊지 마시오.

우리의 비참함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좀 더 나은 상태로 올라갈 수 있다는 소망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오.
그것이 우리 상태를 정말로 절망적으로 만든다오.

땅에서는 아무리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에 떨어져도 일말에 소망이 남아 있게 마련이지요.

이곳의 우리는 소망도 도움도 없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당연하오.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것이오.

이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을 쥐어 뜯고 이를 갈게 되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면 얼마나 좋겠오. 

불행히도 우리는 상실의 고통뿐 아니라 감각적인 고통까지 시달린다오.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말했으니 이젠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말하겠소."

 

*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

"먼저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오.

이곳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그 종류가 만가지도 더 된다오.
땅에서는 어지간해서는 한번에 한가지 이상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드물지요.
그런데 만약 전염병과 통풍과 열병을 한꺼번에 앓게 된다면 스스로 얼마나 비참하게 느끼겠소?
그런데 그런 병을 다 합쳐봐야 이곳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벼룩에게 한번 물린 것에 지나지 않소.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나 역겨운 지옥의 다양한 면들을 부닥쳐야 하오.

이곳에서는 우리를 태우는 영원한 불이 있고, 숨이 콱 막히게 하는 펄펄 끓는 유황 못이 있고, 공포로 짓누르는 철저한 흑암이 있고, 우리를 영원히 갉아 먹는 양심의 구더기가 있소.

이것들 가운데 한가지라도 인류가 땅에서 느끼는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클 것이오.

이곳에서 당하는 고통은 가짓수만 많을 뿐 아니라 총체적이기도 해서 몸의 각 부분에 온 영혼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을 가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오. 땅에서는 병에 걸리면 아픈 부위도 있고 아프지 않은 부위도 있지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오.

영혼과 육체의 각 부분이 한꺼번에 아픈 것이오.

눈 은 너무나 어둡고 공포스러운 형상으로 다가오는 마귀의 모습에 고통을 당하고, 귀는 멸망당한 자들이 쉴 새 없이 내지르는 비명과 절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코는 찌를 듯한 유황연기에 시달리고, 혀는 뜨거운 유황 용액에 끊임없이 데이고, 전신은 불못에서 종일 뒹굴러야 한다오.

영혼의 모든 역량과 기능도 고통을 당한다오.

상상력은 지금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느라, 기억력은 우리가 천국을 상실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친 것을 떠올리느라 고통을 당한다오.

정신은 우리가 땅 위에서 얼마나 귀중한 세월을 악한 생활에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에 시달린다오.

오성(悟性)은 과거의 쾌락과 현재의 고통과 영원히 계속될 장래의 슬픔을 생각하고서 고통을 당하며, 양심은 쉴 새 없이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오.

우리의 비참함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또 한가지는 고통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오.

우리를 태우는 불은 세상의 바닷물을 다 끌어와도 끌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격렬하오.

우리가 이곳에서 당하는 고통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알 길이 없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의 죽어가는 생명을 그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유지케 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오.

천사의 능력으로도 버텨낼 수 없는 고통이라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또 한가지 요소는 이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다양하고 총체적이고 극단적인 고통이 지속적이기까지 한 것이오.

잠깐 고통을 쉴 수 있다면 한숨을 돌릴텐데 그런 것이 없소.

극단적이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인 고통인 것이오.

고통이 조금이라도 완화되는 순간이 있다면 적지 않은 위로가 될텐데.

한 순간도 중단됨 없이 언제까지나 지속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을 너무나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오.

지금 당하는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오.

이 현실이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고, 이 증오심이 우리를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오.

우리가 이곳에 속해 있는 사회나 사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라오.

고통을 가하는 마귀들과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이 모두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지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잔뜩 겁에 질린 비명과 절규, 그리고 우리를 이곳에 들어오게 하신 분에 대한 참람한 말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라오.

그리고 이곳에서는 동료 영혼들도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 조금도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장소 역시 우리의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든다오.

감옥, 지하감옥, 무저갱, 불못과 유황, 영원히 식지 않는 용광로, 영원히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지옥 그 자체, 과연 이곳은 고통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오.

이러한 두렵고 절망적인 장소가 우리의 비참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오.

냉혈한들인 고문자들이 우리의 괴로움에 한가지를 더 얹는다오.

고문자들은 사탄의 추종자들인 마귀들인데,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데서 즐거움을 얻고 있소.

지금까지 내가 열거한 구체적인 사항들만으로도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이오.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줄 당신은 모를거요.

마태 25/41 그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는 예수님 음성이 쟁쟁하오.

그 치명적인 선고를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텐데!

하지만 전능자의 권능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더하고 계신다오.

영원히 당해야 할 고통을 어찌 다 당해야 할 지 막막하나 그것이 내가 견뎌야 할 몫이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비참한 처지라오.

고문하는 마귀는 멸망당한 자를 다음과 같이 몰아 세웠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이 모든 고통을 당해도 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땅에서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숱한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믿지 않았지?

오히려 지옥에 관해 말해주는 자를 비웃었다.

너는 전능자의 공의(justice)를 향해 멸망시킬테면 멸망시키라는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소원대로 된 것을 불평한단 말인가?

너는 구원의 제의를 받고도 거절했으면서도 무슨 낯짝으로 불평한단 말인가?

불평을 하자면 나는 너보다 억울한 것이 더 많다.

너는 기회라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죄를 짓는 그 순간에 지옥행을 선고받았다.
네게는 수 없이 구원과 용서와 사죄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는 한번도 자비의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죄를 짓는 그 즉시로 영원한 형벌을 선고받고 말았다.

만약 단 한번이라도 구원의 제안을 받았다면 너처럼 경솔히 그 구원의 기회를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천국을 마다하고 멸망을 택한 너를 이제 누가 불쌍히 여겨주겠느냐?"

비참한 영혼은 이 말을 듣더니 마귀를 향해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아, 이제 제발 나를 고문하지 마라!

이렇게 멸망당한 게 모두 내 탓인 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아 그것을 잊을 수만 있다면!
구원 받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내게 가장 큰 병이다.

나는 멸망을 당했고, 이것은 정당한 처분이다.

저주 받은 마귀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네 유혹 때문이다.

네가 나를 유혹하는 바람에 내가 이런 죄들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훈계한단 말인가?

나는 네게 끊임 없이 시험을 당했고, 네 사악한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말을 들은 마귀는 냉소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너를 이곳으로 떨어지도록 유혹한 것이 나의 소행이었음을 나도 인정한다.

네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다 그렇게들 말했지.
그들은 우리가 너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우는 사자들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아 다녔다.(벧전 5/8)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전도자들의 말을 믿고 돌아서서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까봐 조마조마했었다.

하지만 너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따라와 주었고, 우리가 할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 주었으니 우리가 네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 거짓 증인들에게 가해질 형벌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멸망당한 영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고문하는 마귀들은 지옥의 분노로 용암과 유황을 끊임없이 그들이게 퍼 부었고, 그들은 극심한 분노와 고통을 못 이겨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에페네투스가 마귀에게 고문하는 이유를 물어보자 마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벌을 받을 만한 자들이다.

다른 사람에게 천국에 가는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듯 행세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지옥을 너무나 사랑한 탓에 이 곳에 온 저주받은 자들이다.

땅에서 지옥의 중요한 대리자 역할을 했으므로 지옥에서 특별한 대접을 해 주는게 마땅하다.

우리는 영혼에게 벌을 가할 때 각자 받아야 할 몫을 넘기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이들이게는 안심하고 제한 없이 고통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가르침과 행실로 그릇된 길로 인도한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 너무 늦게 회개한 영혼

그곳을 떠나 좀 더 가다가 애를 끓는 듯한 비참한 원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속여 이 곳에 떨어지게 한 자들을 향해 내뱉는 멸망 받은 영혼의 원망이었습니다.

"내가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내게 죽기 전에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했다오.

그런데 그들이 시키는대로 했다가 이 영원한 슬픔에 떨어지고 만 것이오.

임 종 침상에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말했지만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오. 임종을 앞두고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 마귀가 나더러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이제 너무 늦었으니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며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오."

이에 대해 마귀가 답하기를 ""오히려 공정하게 잘 된 것이 아니냐?

너는 죄를 좇아 인생을 허비하고 더러운 일을 탐닉해놓고서 막상 죽을 때가 되자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정신 나간 자 말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죽을 때 천국에 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거룩한 생각을 해야 마땅하다.

너는 죽기 전에 "주여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고만 하면 된다고 네 난잡한 친구들에게 들었겠지.

그것을 구실이라고 대는거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펼쳐서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는 말씀을 읽었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을 정리하면 너는 능력 닿는 데까지 죄를 즐기려는 태도로 인생을 살았다.

죽음을 앞두고서 죄를 버린 것은 죄가 싫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죄를 따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죄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은 채 천국에 가려고 했단 말인가?

그런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너는 세상에서 경고를 들을 만큼 들었으므로 스스로 속지 말았어야 했다.

갈라디아서 6/7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에 이런 원칙이 분명히 천명되어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원망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원망하려면 너무 늦게 깨달은 네 어리석음에 대해서나 원망하라."

 

출처 : 존 번연이 본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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